현실성에 대해 생각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던 것인가.
일부러 어딘가부터 잘라낸 적도 없으니
아쉬울 것 없는 자연스러운 엔딩일 것이다.
사실 나는 무엇 하나 마감한 일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대상성이란 건 늘 그렇다.
의미부여에 의한 존재감의 발생.
현실성에 덧붙여진 쓸데없는 가치.
결국엔 자기만족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잃었으므로 할말이 없다.
어쩔 수 없다.

재생

당연한 일이지만 재생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꼬리 달린 도마뱀과 같은 물리적 재생을 인간이 할 수는 없지만,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어 기분전환이나 체력을 회복하는 등 신체적 재생을 하게된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또 스스로의 내면의 상처나 동요, 혼란 등 관해서 치유할 수 있는 내재적 재생도 할 수 있다. 먹고 마시고 수면을 취하는 일상의 방법을 넘어서 독서와 음악, 명상등을 통해 좀 더 자신에게 접근하거나 집중하는 정신적인 경험을 통한 재생이 재미있다. 예컨데 하루키는 내재적 춤을 통한 재생을 그렸고 본질적으로 재생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역시나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회복이 필요한 소모적이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간한다. 만약 그 소모됨이 싫다면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덜 소모적으로 살아가는 방법뿐이다. 덜 쓰든 더 쓰든 무엇이라 말 할 수 없는 일이다. 필연적인 일이기에 어떻게 살아가든 개인의 선택이다. 때문에 재생과 치유방법의 선택 또한 스스로의 몫이라 생각한다.

레종데트르

자신의 지인 수 만큼 또 다른 스스로가 존재한다. 쉽게 말해 내가 아는 사람이 10명이 있다면 김동휘는 그만큼의 다른 김동휘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란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다르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미감이 다르니 10명의 김동휘를 모아 놓고 보면 그 10명의 김동휘들은 제각기 다른 사람일 것이다. 예컨데 나는 누군가에게는 쿨해지려하는 겉멋이 든 재수 없는 친구일 것이고, 사실 나는 은근히 그런 취급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특히 여자 친구들로부터, 장난기없이 고민을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는 나는 사뭇 진지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소위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김동휘라는 사람의 생김새와 쓰임새가 각자 다르기에  김동휘들을 모아 놓고 보면 어느 하나 같은 인물이 없으니까 그런 상상을 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자신의 총체는 스스로가 어렴풋한 이미지로서 겨우 그 정도로서만 자각 될 수 있는 것이기에 타인을 위해 증명해 보이는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결국 레종데트르는 그처럼 무의미한 자기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

빠르게 빠르게 지나쳤던 무심의 행위들.
한없이 빠져들던 부유(浮遊)했던 몸짓.
뒤에서 베어들던 아늑한 초록.
끝날것 같지 않았던 그 시간.
날이 밝아 흐트려졌던 그 투명한 파편들.
새벽녘 완만했던 그 하얀 곡선.
두 발에 전해지던 플로어의 감촉.
그 날 아침 나는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은 분명 기분나쁘지 않은 이질감이었다.